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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ginal Article: NCID AA11574834

Korean Version Updated: 6th October 2016

징병제와 발화장애인의 신체:
말더듬이에 착목하여

와타나베 카츠노리

translated by 곽 정란

들어가며

말더듬은 간단히 말하자면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할 때 말을 반복하는 발화 장애로 발화자 신체에 장애가 있다고 간주되기 쉽다. 그러나 말더듬의 문제는 말을 더듬는 사람(吃音者,이하, 말더듬이)을 둘러싼 인간 관계나 사회라는 관점을 분리해서는 생각할 수 없다(1). 말더듬을 발화자의 신체 장애로 인식 버리는 것에 의해 그 배경 마다 보이는 사회와 언어의 관계를 놓쳐 버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일본의 역사를 되돌아 보면 말더듬을 치료하는 것(말더듬 교정)이 발화자의 신체를 넘어 더 큰 맥락과 결부 된 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메이지·다이쇼 시대에 말더듬 교정 기관으로서 이름을 떨친 ‘낙석사(楽石社)(2) ’는 설립자·이사와 슈지(伊沢修二)의 위업을 기리는 기념 사업으로 발간 된 책에서 다음과 같은 기술을 남기고 있다(3).

메이지 39년(1906년) 9월 9일 [말더듬] 교정자 천 명이라는 기념 보고회를 열고 두루 이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 국가를 위해서 한 사람이라도 많이 이들 불행자를 감소시키고자 애썼다. 아아 한 사람이라도 구한다면 그 일생의 은혜가 막대하거니 하물며 천 명도 넘게 구한 이 은덕은 실로 크도다(故伊澤先生記念事業会編 1919:263-264).

내무성은 낙석사의 활동을 높이 사 보조금을 하달하기도 하였다. 발화장애의 교정인 말더듬 교정이 ‘국가를 위해서’와 연결되어 논의된 것은 왜 일까. 발화장애의 교정과 국가를 연결하는 이 논리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이 논리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열쇠를 이사와 슈지(伊沢修二)라는 인물에서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예를 들어, 이사와 슈지(伊沢修二)의 국가관과 언어관에 대해 대만 총독부 학무 부장 시대에 주목 한 것으로 일본인화 교육에 관한 오구에 에이지(小熊英二)의 연구(小熊 1998)나, 일본어 교육과의 관계에 관한 오사 시즈에(長志珠絵)의 연구(長 1998)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말더듬 교정 실적이 누적됨에 따라 이사와 슈지(伊沢修二)는 낙석사의 활동을 방언 교정(訛音矯正)으로 넓혀가게 되었다. 낙석사의 활동은 타이완 총독부 이후 일관된 언어관에 근거하고 있다. 오사(長)가 기술한 바와 같이 이자와 슈지(伊沢修二)는 ‘음성중심주의’'라고 할 수 있는 일관된 언어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사와(伊沢)에게 언어는 무엇보다도 음성이었다.

언어에 있어서 음성에 주목을 하면 낙석사의 말더듬 교정과 방언교정의 연결은 발화 교정으로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음성을 통한 말더듬과 방언이라는 착목점에서 말더듬 교정과 국가라는 질문을 진행할 수 있다.

즉 말더듬 교정과 국가라는 연결 관계를 고찰하는 데 있어서 이사와 슈지라는 한 사람의 인물에 그 원인을 귀결시키는 것에 주안을 둘 수는 없다. 말더듬 교정과 국가를 연결 짓는 논리를 해석하는 것이야말로 본고의 주안점이다. 그렇다면 이사와 쇼지에게 발화음성의 교정은 어떠한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 카미누마 하치로(上沼八郎)는 방언교정의 의의의 하나로 군대의 전령을 들고 있다.

의미불명의 전문과 작문 또한 군대의 전령이 공병과 포병의 사용 구분을 할 수 없는 것 등의 사실을 통해서도 동북지방 방언(가온)의 교정이 매우 시대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는 것을 할 수 있다(上沼1962/1988:309-310)

카미누가의 지적에 따르면 말더듬 교정은 군대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카미누마의 기술을 단서로 군대에 착목하여 말더듬 교정과 국가의 관계를 풀어가고자 한다. 먼저 말더듬이와 군대를 둘러싼 두 이야기를 제시한다(제1절). 다음으로 징병제의 역사를 확인한다(제2절). 본고에서 중요한 것은 징병 검사와 조사·통계(제3절) 징병 검사와 신체 (제4절)이다.

1. 말더듬과 군대를 둘러싼 두 이야기――‘말더듬이 중사(訥軍曹)’와 오스기 사카에(大杉栄)

먼저 군대와 말더듬이를 둘러싼 두 가지 이야기를 제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두 이야기 중 하나는 소설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저명한 사상가의 에피소드이다.

첫 번째 이야기는 1895년 바로 청일전쟁 이듬해 이시바시 닌게츠(石橋忍月)가 발표한 단편소설 “말더듬이 중사(訥軍曹)”이다(4). 소설의 주인공인 오니고로(鬼五郎)는 빈고(備後)의 나라 효바라마을(庄原村)에 살고 있는 ‘대력무쌍의 사나이’ 였다. 그러나 그는 ‘말 더듬는 도깨비(鬼, 오니)’라고 불리는 타고난 말더듬이였다. 때마침 청일전쟁 중에 오니고로에게 청일전쟁의 소집 영장이 도착했다. ‘마을을 대표하는 사내'로 뽑힌 오니고로는 히로시마에서 신체검사를 받게 된다. 그러나 마을의 기대를 한 몸에 짊어진 오니고로에게 내려진 것은 군의(軍医)에 의한 다음과 같은 처사였다.

[사례1] 군의는 그의 신체 검사를 마치고 그의 이름 족적 그 외 두 세 가지를 질문했는데 하지만 말더듬이 오니는 언변이 불명료 하여 의관으로부터 충분한 답변 능력이 없는 자로 인정되어 군의는 이 인정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 다시 질문을 하자 더 더욱 말을 더듬어 군의는 속이는 말더듬이는 중사로서 이 직무를 수행할 턱이 없다고 단정하고 한번에 ‘불합격, 돌아가라’고 선고하였다(石橋1895/1995:318).

오니고로는 고뇌와 절망의 끝에 지인 경감에게 부탁해 겨우 입영을 허가 받게 된다. 마지막으로 오니고로는 분대의 지시(호령)을 훌륭하게 수행해 내고 전사하게 된다.

두 번째 이야기는 다이쇼 아나키즘으로 유명한 오스기 사카에(大杉栄)에 관한 에피소드이다. 오스기 사카에도 타고난 말더듬이였다. 오스기는 1899년에 나고야의 소년병학교에 입학하여(5) 1901 년 11월에 동창과의 싸움이 원인이 되어 퇴학 처분을 받는다. 오스기의 말더듬은 소년병학교에서는 질타의 대상이 되어 동급생으로부터는 놀림의 대상이 되었다. 예를 들어, 오스기는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를 들고 있다.

[사례2] 어느 날 대위는 저녁 식사 때 오늘 달은 상현인가 하현인가라는 질문을 냈다. …그것이 하현이라는 것은 물론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 ‘하(카)’라는 발음을 도저히 낼 수 없었다. 말더듬은 카(か)행과 타(た)행 그 중에서도 카행이 가장 금물이다. 하물며 더욱 그 아래에 또 카행인 ‘개(げ)’가 이어지는 것이다. ‘상현은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럼 뭐야?’ ‘상현이 아닙니다.’ ‘그럼 도대체 뭐야?’ ‘상현이 아닙니다.’ ‘그럼 뭐야?’ ‘상현이 아닙니다.’ ‘뭐?’ ‘상현이 아닙니다’ 되물음을 당하면 더더욱 말이 안 나오는 나는 군인답게 바로 답을 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그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모두 들은 킬킬대며 웃었다(오스기1923/1971:108)

같은 소년병학교 출신인 마쓰시타 요시오(松下芳男)는 오스기의 말더듬에 대한 질타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사례3] 소년병 학교 라기보다는 육해군학교, 군대에서 음성(음정)이 큰 것, 언어의 명료 한 것이 요구되는 것은 그 직무 성격상 당연한 일이다. 오스기는 소년병 학교에서 학생 감독의 장교와 조교 하사관로부터 ‘더 분명히 말해’ ‘어미를 명료하게 해라’ ‘다시 복창하라’라고 고함을 듣고벌벌 떨면서 더듬고 있으면 ‘빨리 말해!’라고 질타를 당해 점점 더 더듬어 말을 못하게 되어 버린다(鎌田1997/2003:61)

이시바시 닌게쯔(石橋忍月)의 단편 소설과 오스기 사카에(大杉栄)의 에피소드는 거의 같은 시기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두 이야기에서 말더듬이라는 존재는 조금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말 더듬는 중사”에서 말더듬은 징병 검사에 의해 배제되는 대상이었다. 한편 소년병 학교 시절 오스기 사카에에게 말더듬은 교정해야 할 대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양자의 작은 차이를 다른 요인에서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아 보인다. 예를 들어, 제1의 가능성으로 오니고로는 성인이며, 오스기는 소년이다(6). 현재 성인의 말더듬은 치유가 어렵지만 유년기라면 말더듬 치유는 어느 정도라도 가능하다고 여겨지고 있다. 오니고로는 성인 임에도 불구하고 말더듬이 있었기 때문에 배제 된 것이며, 오스기는 치유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교정에 임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이 대답은 현재의 말더듬 해석을 당시의 말더듬관으로 가져간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오스기는 25세가 지나서도 말더듬 교정에 열심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荒村1976:193).

제2의 가능성은 더 간단하다. 오니고로는 소설이며, 오스기는 실화 에피소드이다. 소설을 실제 사건으로 파악하는 것에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 그래서 시대는 조금 내려 가지만 1919년에 낙석사에서 간행된 책에 적혀있는 에피소드를 들고자 한다. 먼저 미술학교 학생들의 감사의 서면에는 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다.

[사례4] 제 말더듬은 가벼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소위 난발성〔막혀 소리가 안 나오는 것]입니다, 발음하려고 할 때, 입을 우물 우물 하게 되어버리는 성질로, 특히 오랫동안 이야기하려고 할 때는, 완전히 막혀 말할 수 없기 때문에 항상 부득요령으로 끝납니다. 코이시카와 구청에서 징병 검사를 받았을 때는 징병관 앞에서 성명본적을 아무리 애써도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 때는 큰 웃음거리가 되어 창피를 당했지만 그것 때문에 병종(丙種)이 되었습니다(故伊澤先生記念事業会編1919:266).

병종 합격은 병역 면제를 의미하는 ‘정종(丁種) 불합격’의 하나 위에 있는 것으로 외지로 보내지 않는 말하자면 최저 라인의 합격이다. 다른 신체적인 요인을 알 수 없지만, 오니고로처럼 말더듬에 의해 병역에 부적격이라고 선고되는 말더듬이의 모습이 여기에 있다.

마찬가지로 중학교 학생의 다음과 같은 서면을 들 수 있다.

[사례5] 중학교 2년 무렵 이었지만, 해군사관학교 규칙서에 언어장애자는 입학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이 몸은 보통사람처럼 대우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깊이 한탄하였다(故伊澤先生記念事業会編1919:266)

분명히, 1915년 '해군 사관학교 학생 지원자 심득(海軍兵学校生徒志願者心得)’에서 ‘백치, 정신이상, 언어장애, 지각 및 운동 마비’는 신체 검사에서 불합격이라고 되었다(大濱編1978:444). ‘언어장애’라는 의미가 넓기 때문에 말더듬이에 대한 처우로 간주할 수는 없지만, 발화 장애가 군대에서 문제시되는 것이라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니고로와 오스기의 이야기는 모두 말더듬이에 대한 처우로 특수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 다음 절에서는 군대에서 배제의 대상이 되는 말더듬과 소년병 학교에서 말더듬의 대상이 되는 말더듬, 이 관계를 징병제의 역사에서 고찰 하고자 한다.

2. 징병제의 변천

먼저 일본의 징병제에 대해 개관한다. 일본의 징병제는 1870년의 ‘징병 규칙’을 효시로 하고 있다. ‘징병 규칙’은 ‘각 도부번현(道府藩県) 무사출신이나 서민출신에 불문하고 신체 건장하고 병정 임무를 잘 견딜 수 있는 자를 선택하여 1만석에 다섯 명씩 오사카 출장 병부성에 가능 차출’(由井외編1989:36)하는 것으로, 처음의 전국 모병이었다. 그러나 규모가 작고, ‘그 실시에 의한 징병의 실체도 극히 빈약 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由井1989:436)이라고 되어 있다.

그 후 1872년의 ‘징병 조서와 훈시’와 이듬해 1873년의 ‘징병령’에 의해 징병제는 기초를 다지게 된다. 주목해야 할 점은 다음의 두 가지이다.

첫째, 징병령 이후 징병은 ‘1만석에 다섯 명’이라는 단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징병 검사를 통해 이루어지게 되었다. 징병 규칙에도 의관에 의한 검사는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각 도부번현에 의한 추천자가 대상이 되었다. 1873년 징병령에 의해 20세가 된 자에게 징병 검사가 내려지게 되었다.

둘째, 1873년의 징병령도 또한 징병으로는 빈약 한 것이었다. 그 이유는 광범위한 이유를 가지는 ‘상비병 면역 규칙’에 있었다. 1873년의 징병 령은 광범위한 면제 조항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자가 면제를 인정하고 있었다.

(1)체격 불량자 (2)육해군장교 생도 (3) 관리 및 소정의 학교 학생·졸업생 (4)호주 및 그 그 후계자 (5)범죄자 (6)가정에 사정이 있는 자 (7)대인료 270엔을 상납한 자(吉田1989:464)

병역 면제 조항에 따라 징병 검사를 피한 자는 다수에 달했다. 그 실태는 ‘징병의 실태에 대해 육군성 연보’(1878년) 등으로 확인 할 수 있다.

올해 [1878년] 전국에 스무 살 장정의 총원은 삼십 일만 칠천 육백 육십 육 명 하고 이에 이듬해로 돌아오는 자 구천 육백 이십 삼 명을 더해 합계 삼십 이만 칠천 이백 팔십 구명이 된다. 올해 이십 구만 영 칠백 팔십 오명은 면제에 속하는 자로 올 해의 징병 명부에 오르는 자는 즉 삼만 육천 오백 명…(由井외編1989:110)

1873년 징병령에 의해 성인 남성이라면 징병 검사를 받을 가능성이 생겼지만 실제로는 1873년의 징병령은 '생업'을 잃게 될 농민의 반발 (‘혈세 운동’)과 함께 광범위한 면제 조항을 이용한 수많은 징병 기피를 낳았다. 따라서 징병령은 병역 면제 조항을 둘러싸고 여러 차례 개정을 반복하게 되었다.

몇 차례의 개정을 거친 후 1889년 ‘개정’ 징병령에 의해 일본의 징병제는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1889년의 개정에 의해 징병령의 면제 조항은 거의 모두 없어졌다(7). 그 후, 징병령은 몇 차례의 개정을 거쳐 1927년 이후는 ‘병역령’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러나 '국민 개병’을 목표로 한 징병 제도로서는 1889년 개정 징병령이 원형이다.

이상, 메이지 시대의 징병제에 대해 개략적으로 확인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이상의 세 가지로, 앞으로 각각 징병 규칙(1870년), 징병령(1873년), 개정 징병령(1889년)으로 부르고자 한다.

3. 징병 검사 및 조사·통계

징병제의 변천에서 제일 먼저 주목을 끄는 것은 징병 규칙 (1870년)과 징병령(1873년)의 징병의 산정 방법이다. 특히 징병 규칙처럼 수확량을 참조하여 징병하는 인원수를 결정하는 방식은 현재 관점에서 보면 몹시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징병 규칙은 단 3년이라는 단기간에 징병령으로 전환되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로서 첫째 메이지 정부가 참조 할만한 데이터가 수확량 밖에 없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다카시 후지타니가 말하는 것처럼 에도 시대에 정치적 권력이 향한 것은 토지 뿐이며 일본이라는 국가 단위에서 ‘새 정부가 제시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자료는 분명 토지의 생산량을 제시하는 지표인 “미곡 수확량” 단 하나였다’(Fujitani1999:167). ‘메이지 정부는 성립 당시부터 이상하다고 생각 될 만큼 강하게, 여러 통계의 편찬을 진행해 왔 [다]’(速水1992:2)라고는 하지만, 최초의 인구 통계인 ‘일본 전국 호적 표’가 나온 것은 1872년이다. 징병 규칙 시점에서는 메이지 정부는 신용만한 인구 통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둘째, 징병령은 ‘일본 전국 호적표’ 이듬해 공포되었다. 이것은 인구 통계와 징병령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후지타니에 의하면, 징병과 인구 통계의 관계는 국민을 소집하기 위한 연계이다.

이 징병 시스템은 상비군을 위한 잠재적 징수병의 저수지인 20세 이상 총인구에 대해 완전한 지식을 요구뿐만 아니라 나아가 17세부터 40세까지의 모든 남자에 대한 데이터를 필요로 했다. 왜냐하면 그 남자는 ‘국민군’, 다시 말해 국가 위급 시에 소집할 수 있는 민병조직(militia)를 구성 할 수 있도록 구상되어 있었기 때문이다(Fujitani1999:167).

여기에 징병제와 통계의 관계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징병령에 의해 징병은 정부에 의해 수집 된 인구 통계에 의하여 이루어지게 되었다. 또한 동시에 그 결과 실시되는 징병 검사 자체가 정부의 징병 시스템을 위한 데이터 수집의 장이 되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징병 검사를 받게 된 자는 군의에 의해 성명, 주소, 생년월일, 결혼, 가족 구성, 종교, 계산 능력, 독해 능력, 신장, 심지어 얼굴·이마·눈·코·입·턱·머리카락·눈썹의 특징, 천연두 예방 접종의 유무가 기재된다(cf.由井외編1989:81-83). 징병 검사는 바로 ‘사상 처음으로 실시 된 대규모적인, 그리고 국가적인 일본의 일반 서민에 대한 검사였다’(Fujitani1999:168).

그렇다면 여기서 관점을 말더듬이에게 돌려 보자. 제1절에서 다룬 사례를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

[사례1] 군의은 그의 신체 검사를 마치고 그의 이름 족적 그 외 두 세 가지를 질문했는데 하지만 말더듬이 오니는 언변이 불명료 하여 의관으로부터 충분한 답변 능력이 없는 자로 인정되어(石橋1895/1995:318).
[사례1] 코이시카와 구청에서 징병 검사를 받았을 때는 징병관 앞에서 성명본적을 아무리 애써도 말하지 못했다. 그 때는 큰 웃음거리가 되어 창피를 당했지만 그것 때문에 병종(丙種)이 되었습니다(故伊澤先生記念事業会編1919:266).

말더듬이가 발생하는 것은 결코 말하기 능력을 검사하는 장면에서 아니다. ‘그 이름 족적 외 두 세가지 것에 대해 질문을 받거나’ ‘성명본적을 아무래도 말 할 수 없다’라는 장면에서 이다. 이 장면은 발화능력을 의학적으로 검사하는 장면이 아니다. 언뜻 보면 검사관이 성명·주소 등을 확인하는 장면에 우연적으로 마침 그렇게 되어 버리는 장면이다. 그러나 이 장면은 결코 우연으로 생긴 것은 아니다. 1883년에 반포 된 ‘징병 업무 조례’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제45조 장정 신체 검사 끝날 때 마다, 부현 주재관은 부현 병사 과장과 함께 사람 구분표에 의거하여 본인에게 성명 주소 족적 직업 부모의 성명 등 틀린 것이 없는지를 질문하여(東京都編1976:474).

전술 한 바와 같이, 징병 검사는 단순한 신체 검사가 아니라 인구 통계 데이터 수집과 관련된 것이다. 따라서 성명·주소의 확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말더듬이의 ‘선별’이 통계 데이터의 확인의 장면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낳게 된다. 말더듬은 징병 검사에서 ‘불합격’([사례1]), ‘병종 합격"’([사례4])에 해당한다고 하더라도, 왜 말더듬이들은 발화능력을 의학적으로 검사하는 장면에 놓이지 않았던 것일까. 바꿔 말하자면, 말더듬이의 신체는 징병 검사에서 그 발화능력을 어떠한 방법으로 검사를 한 것일까. 다음 절에서는 징병 검사에서 신체에 대해 확인 후에 말더듬에 관한 고찰을 하고자 한다.

4. 징병 검사 및 신체

제2절에서 언급했듯이, 징병령(1873년)에 의해 징병의 대상이 된 사람들은 증가했다. 그러나 실제로 징병 검사를 받는 사람들은 아직 소수였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징병 검사를 받게 된 것은 개정 징병령(1889년) 이후이다. 개정 징병령 이후 많은 사람들이 징병 검사를 받게 되었다.

말할 것도 없이 징병 검사는 ‘병역에 종사하지 않을 자 [개정 징병령 제17조]’(由井외編1989:124)의 선별을 위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징병 검사에서 검사하는 신체의 선별은 병역과 출병을 견딜 수 있는 육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예로, 질병 (특히 감염증)에 대해 다루어 보자.

카노 마사나오(鹿野政直)에 따르면 메이지 시대에 다양한 장소에서 사람들이 모이는 것에 의해 감염증의 확대가 생겼다고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산업 혁명에 따른 공장 노동자의 증가이다.

산업 혁명은 엄청난 노동자를 농어촌에서 모아 먼지가 많은 직장에서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며 열악한 환경에서의 거주를 불가피하게 했다. 거기에 결핵균이 비집고 들어갈 경우 면역이 없는 육체는 좋은 숙주가 되었다(鹿野2001:38).

이러한 사태는 징병과 군대 운영에도 관련되어 간다. 징병에서는 공장 생활의 건강에 해로운 생활은 징병 검사 불합격자를 낳는 문제로 간주되었다(鹿野2001:42). 당시 군대에서는 결핵뿐만 아니라 성병이나 각기병이 병사의 신체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8).

징병제에 의해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배치되는 군대에서 감염이 가지는 의미는 중요하다. 감염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배제하는 것뿐만 아니라, 병사의 신체는 집단 생활이나 힘든 생활 상황 속에서 감염증의 온상이 될 수 있다. 감염증이라는 사태는 병사의 신체를 통해 군대를 내부에서 소모시킨다. 감염증은 군대 전체의 근간과 관련된 사안이며, 군대는 감염의 가능성을 배제 할 필요가 있다.

이상에서 군대에서 신체에는 다음의 두 가지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징병 후의 훈련·출정에 적합한 신체이고, 둘째 군대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감염원으로서 신체이다.

말더듬과 징병검사라는 본고의 과제에서도 이 두 가지 점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 말더듬이 병역·출정에 방해가 되는 장애인지 아닌지 하는 문제이다. 여기에 카미누마(上沼)가 지적한 ‘전령 방해’로서의 말더듬이 있다. 군대에서 전령·호령을 할 수 있는 발화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양성 학교에서 ‘호령 조 목소리’ 훈련이 중시되고 있던 것으로부터도 분명하다(9). 우메모리 나오유키(梅森直之)가 지적 하듯이, ‘조직적인 행동을 그 취지로 하는 군대에서 “호령 조 목소리”는 그러한 조직적 행동을 낳는 지휘봉 역할을 하며, 그 능력은 특히 장교에게는 필수적인 것이다’(梅森1998:71). 오스기 사카에(大杉栄)의 소년병 학교 시절의 경험([사례2, 3])과 해군 사관학교에서 언어장애인의 배제([사례5])는 명료한 발화능력이 병사의 신체로서 요구되고 있던 것의 증좌일 것이다.

그렇다면 앞에서 말한 것처럼, 왜 말더듬이들은 발화능력의 의학적 검사 장면에는 놓이지 않았던 것일까. 여기에 징병 검사와 발화장애의 하나의 계략이 있다. 사실, 언어 능력은 징병 검사에서 검사 된 것이었다. 명료한 발화능력은 잠재적인 형태로 측정 되었다. 예를 들어, ‘개정 징병제 문답’(1907년)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술이 보인다.

검사관이 점호 이름을 불릴 때에는 큰 목소리로 대답을 해야 한다(大濱編1978:24).

그렇다면 앞 절에서 기술한 것 같은 성명·주소 확인도 또한 통계 데이터의 수집과 함께 언어 능력 검사도 겸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병역령’ 시대가 되지만, 1934년, 육군 이등 군의 (당시) 아치와 고로(阿知波五郎)는 ‘해군 군의회 잡지’에 다음과 같은 기술을 남기고 있다.

[말더듬 검사는] 특히 징병 검사와 같이, 다수의 사람을 단시간 내에 검사하는데 있어서 정의관 뿐만 아니라 시력, 청력검사를 측정할 때도 시종 이것의 관찰을 게을리하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다(阿知波1934:239)

아치와는 말더듬 증상은 천차만별이며, ‘일견 이것을 식별하기 어려워도 사소한 동기에 의해 당연히 이것을 노출하는 것’(阿知波1934:239)이 있기 때문에, 각별한 관찰력을 가지고 다른 검사를 할 때 발화에 주목해야 할 필요성을 말하고 있다. 징병 검사에서 점호 시의 응답과 신체 검사의 대답은 발화 능력 검사도 의미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은 두 번째로 말더듬의 감염여부라는 문제이다. 말더듬이 감염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군대에서 배제해야 할 대상이 된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말더듬과 감염이라는 연결은 기이하게 느낄 것이다. 말더듬은 당연히 감염증이 아니다. 하지만 말더듬의 원인론에 눈을 돌리면 당시 말더듬 연구에서는 ‘모방’의 문제가 있었다. 특히, 낙석사를 설립한 이사와 슈지(伊沢修二)에게 있어서 모방은 말더듬의 ‘최대 원인’ 이였다.

세상에는 말더듬은 유전이라는 설도 있지만, 대부분의 점에 대해서 언급하자면 주로 면 주로 모방에서 오는 것입니다(伊沢1912a/1958:874).

이사와 슈지에게 말더듬은 ‘발음 상에 하나의 나쁜 버릇이 붙어 있는’(伊沢1912b/1985:292) 상태였다(10). 말더듬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인후 안에 있는 성대를 조이는 것이 주원인’이며, 이 조이는 동작은 ‘더듬는 습관’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伊沢1912a/1958:874).

또한 이사와 슈지는 ‘많은 사람들이 그것[말더듬]에 감염되어 말더듬이가 되었다’며 예로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들고 있다(伊沢1912a/1958:874-875). 마을의 맹주였던 인물이 말더듬이였기 때문에 그의 자식, 출입을 하는 자, 의사와 그 제자, 그리고 환자까지도 ‘선생님 처럼 말하는 것이 좋다고 여겨’ 말더듬이가 되어 있었다. 이러한 ‘따라 더듬는다’라는 인위적인 작용이 말더듬이를 증가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사와 슈지는 말더듬은 모방을 통해 ‘감염’(伊沢1912a/1958:874)된다고 생각했다.

이상의 고찰에서 우리의 처음 질문에 하나의 대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낙석사의 ‘국가를 위해 때문에 한 사람이라도 많이 이들 불행자를 없애야 한다’(故伊澤先生記念事業会編1919:263-264)라는 논리는 군대와 관련해서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첫째, 말더듬 교정은 군대의 전령·호령을 가능하게 하는 신체를 양성하는 것을 의미했다. 카미누마(上沼)가 지적했듯이, 전령·호령한다는 점에서 방언·말더듬 교정은 연결되어 있다. 전령·호령을 할 수 없는 발화장애인의 신체는 징병 검사에서 배제의 대상이 되었다.

둘째, 말더듬 교정은 군대의 운영에 지장을 초래하는 감염원의 박멸을 의미하고 있었다. 말더듬이의 방치는 모방에 의해 말더듬을 ‘감염’시켜갈 가능성이 있다. 말더듬 교정은 군대에서 신체의 양성과 함께 감염원의 제거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 두 가지의 의미에 주목한다면 말더듬이라는 ‘불행한 자’를 줄인다는 것은 말더듬이의 불행을 경감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말더듬 교정과 국가를 묶는 논리란 말더듬이가 있음으로 해서 군대의 운영에 지장이 초래한다는 것과 말더듬이 감염한다는 국가의 불행을 의미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결론

본고는 말더듬 교정과 국가를 연결 짓는 논리에 착목하여 징병제의 변천을 쫓는 것으로 그 해독을 목표로 하였다. 징병 검사과 말더듬이에 대한 검토를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첫째, 징병 검사에서 말더듬이 노출하는 장면은 발화능력의 의학적 검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통계적 자료의 수집과 결합 된 장면이었다. 또한 통계 자료의 수집 장면이나 질문에 대한 응답 등 다른 신체 검사 장면에서 발화능력 검사가 숨겨져 있었다. 징병 검사는 비명시적 발화능력 검사 이기도 했다.

둘째, 배제 교정의 대상으로서의 말더듬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제시했다. 즉 전령·호령을 위한 발화능력의 결여로서의 말더듬이며, 또한 감염원으로서의 말더듬이이다. 낙석사의 ‘국가를 위해서’라는 기술은 발화능력의 교정과 함께 감염원의 박멸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시사하였다.

물론 본고의 물음은 한정된 것이며, 이 물음은 실제 교정에 관한 검토와 관련 지을 필요가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군대의 호령·전령의 훈화 검토를 들 수 있다. 또한 양성학교 등의 발화교정 장면에서 발화장애인에 대한 처우 및 교정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었는지에 대한 검토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필자의 향후 과제로 삼고자 한다.

(1) 최근에는 말더듬이와 청자간의 문제로서 말더듬을 다룬 미즈마치 토시로(水町俊郎) 등의 연구를 들 수 있다(水町・伊藤編 2005). 타자를 눈 앞에 둔 상호행위 장면에서 말더듬을 다루는 것의 의의에 대해서는 졸고를 참조(渡辺 2003).

(2) 낙서사의 말더듬 교정에 대해서는 쿠레(呉 2004) 또는 졸고(渡辺 2004)를 참조.

(3) 이하, 구글자체를 신글자체로, 카타카나을 히라가나로 바꾸었다. 또한, 현대에는 차별 용어로 간주되는 용어도 포함되어 있지만, 원문대로 표기하였다.

(4) 단, 초출은 미상. 1894년 12월 20일자 「북국신문」에 게재되었다는 기록도 확인되고 있다(榎本・佐久間1995:21).

(5) 오스기 사카에의 부친 오스기 아즈마(大杉東)는 청일전쟁에도 참전한 군인이다.

(6) 오니고로는 33세, 오스기는 14〜16세 경의 이야기이다.

(7) 병역 면제는 제3장 제17조의 ‘병역을 면하는 것은 폐질 또는 불구 등으로 징병 검사 규칙에 비추어 병역에 임할 수 없는 자에 한한다’ (由井외編1989:124) 라고 되었다.

(8) 大濱(大濱編1978)등도 참조할 것.

(9) 히로타 테루유키(広田照幸)에 따르면 육군 소년병 학교에서는 호령 목소리 내는 것에 대한 자주적인 운동이 권장되었다(広田1996:198). 또한 오스기 사카에(大杉栄)의 말더듬과 호령에 대해 고찰한 우메모리(梅森1998) 참조. 또한 본고의 논점의 많은 부분은 메모리의 논고에 의거한 부분이 많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을 전하고자 한다.

(10) 이사와 슈지(伊沢修二)의 언어관과 말더듬과의 관게에 대해서는 졸고(渡辺2004)를 참조.

references

see references in Japanese

acknowledgment

This work was supported by Subsidy for International Dissemination of Research Results (Program to Support the Creation of Websites in Foreign Languages) (FY2016), Ritsumeikan University.

初出:渡辺克典,2005,「徴兵制と発話障害者の身体――吃音者に着目して」『社会言語学』「社会言語学」刊行会,第5号,13-23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