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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ginal Article: DOI http://doi.org/10.5690/kantoh.2004.25

Korean Version Updated: 2nd September 2016

말더듬 교정의 역사사회학:
메이지・다이쇼기의 伊沢修二(이자와 슈지)의 언어교정을 둘러싸고

와타나베 카츠노리

translated by 안 효숙

1. 서론

우리들이 살고 있는 사회에서 말을 바르게 할 수 있는 것, 즉 〈정상적인 발화(発話)〉는 개인적인 문제로 여겨진다. 예를들면 발화의 장애중에 말더듬이의 예를 들어보자. 다음의 예는 식료품점에서 [돼지고기 5덩어리]라는 말이 나오지 않고 [음(well)]라고만 반복했다라는 말더듬이의 고백이다(1).

〔가끔 「음」이라고만 해서〕 내 뒤에 있던 사람이 기다리다 지쳐서 화를 냈습니다. 「뭐라고? 음(well)만 하면 어떻게. 아가씨. 여기서 나가서 집에가서 자요. 당신은 병이야. 않좋아. 병이야! 들려? 병이라고!」[VanRiper1963:339=1967:289].

「음」을 반복해서 말하는 말더듬이에게 「치료」를 권하는 이 장면은 극단적인 예시지만 발화를 발화자 개인의 「병」으로 여기는 장면이다. 「음」을 반복하는 말더듬증상에 대해 병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치료를 재촉하는 남자의 발언은 (거기에 부조리함이나 발언의 부적절함을 느낄 수는 있다고 하자) 세상을 사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말더듬이는 정상적인 발화를 둘러싼 명백해진 지식이 존재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본 원고는 발화장애를 치료하려는 「언어교정에 관한 〈앎〉」의 생성과정을 다룬다. 발화장애로서의 「말더듬」에 주목하여 말더듬교정에 관한 <앎>이 어떠한 시각(입장성立場性)을 가지고 생성되어 왔는가, 바꿔말하자면 말더듬 교정에 관한 <앎>을 사회・역사적으로 구축된 <앎>으로 간주하여 그 시각・입장성을 밝힌다. 말더듬 교정에 관한 <앎>의 위상을 역사적으로 밝히는 작업을 「말더듬 교정의 역사사회학」이라고 하자(2). 말더듬교정의 역사사회학을 통해서 정상적인 발화에 관한 한 사람의 위상을 독해하는 것이 본 원고의 목적이다.

2. 伊沢修二(이자와 슌지)와 楽石社(라쿠세키샤:언어장애아교육기관)

말더듬에 관한 서적을 다수 집필한 伊藤伸二(이토 신지)에 따르면 일본의 말더듬치료의 구조적인 착수가 이루어진 때는 메이지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 볼 수 있다고 한다[이토(편)1976:51].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말더듬에 관해 조직적인 착수를 시작한 것이 1903년에 이자와 슌지가 설립한 「楽石社(라쿠세키샤)」라고 되어있다(3). 이자와 슌지는 미국에서 시각・청각장애아 교육에 이용되고 있던 방법으로 말더듬교정을 실시했다. 라쿠세키샤의 활동은 당초 7명이라는 소수에서 시작했지만 3년후에는 교정자가 천명의 기념회를 열 정도의 규모가 되었다(4). 이자와 슌지는 라쿠세키샤를 통해서 「말더듬이 통계표」작성등에 착수하여 정부로 부터 업적을 인정받아 1901년 이후 내무대신에게 조성금을 받았다 (5). 이토가 말했듯이 말더듬치료의 전문적기관의 시초 중 하나로서 이자와 슌지의 「라쿠세키샤」를 들 수 있다.

이자와 슌지에 관한 다수의 연구는 대만의 「일본어」교육에 관한 것이다. 이자와 슌지는 1895년 대만 통합시절에 대만총독부의 초대 학무부장에 취임하여 「일본어」교육을 추진했다. 교육・역사학에서 이자와 슌지가 했던 대만의 「일본어」교육정책은 천황의 자녀(「일・시동인」)으로서 대만합병을 추진하는 정책이었던 점에 초점에 맞춰져있다(6). 또 근대일본의 경계영역을 연구한 小熊英二(오구마 에이지)는 학교교육을 통해서 대만을 일본에 동화시키려했던 대표적인 인물로서 이자와 슌지를 들고있다. 「이자와에게 대만인을 교육을 통해 『일본인』으로 개조하는 것은 대만을 확보하기 위한 『정신을 정복』 하는 것이었다」[오구마1998:94]. 근대일본의 성립기인 메이지기에서 대만총독부에 파견된 이자와 슌지를 둘러싸고 수많은 연구가 축적되어 있다.

그러나 대만총독부의 학무부장 「이후」의 이자와 슌지에 대해서는 이제까지 구체적으로 다뤄지지 못 했다(7). 이자와 슌지는 1897년에 학무부장을 사직했다. 그 후 도쿄고등사범학교장을 지내고 1903년에 도교도 분쿄구 코이시가와에 「라쿠세키샤」를 설립하여 1917년에 없어지기 전까지 사투리교정과 말더듬교정에 착수했다. 대만의 「일본어」교육과 라쿠세키샤의 업적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 것일까?

마시코・히데노리는 대만의 「일본어」교육과 일본 국내의 사투리교정의 관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879년에 설치되었던〕「오키나와현」에서의 경험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는 대만에서의 「국어(일본어)」교육 실천이 이자와 슌지에게 「내지(일본)」에서의 사투리「교정」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역설적이면서 근대일본의 본질을 상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내지(일본)」에서 「국어(일본어)」를 수출하는 것인데 「내지」자체가 충분히 언어적 통합이 되어있지 않다는 현실에서 필연적인 귀결이었다[마시코2002:76].

사투리 교정이라는 차이는 있지만 마시코의 지적을 따른다면 대만이란 일본 「밖」의 언어적 통합에서 일본「내」의 언어적 통합을 목적으로 한 활동이 라쿠세키샤에 있었고 말더듬교정은 그 연장선으로 이해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라쿠세키샤의 활동목적은 라쿠세키샤 설립 때의 「라쿠세키샤규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자와1903→1958:763-764](8).

1. 시화법(視話法:발음시에 입모양)을 배운다.
2.바른 일본어음을 배운다.
3. 바른 영어음을 배운다.
4. 바른 청나라어을 배운다
5. 바른 대만어음을 배운다.
6.사투리를 교정한다.
7. 말더듬을 교정한다.
8. 말을 못 하는 아이가 말을 할 수 있도록 한다.

제2의 규정에 주목해보면 라쿠세키샤 규정은 일본어의 언어적통합을 꾀한다는 「일본어」교육의 노선에 일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3,4,5,의 규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라쿠세키샤는 영어・청나라어・대만어(당시)의 발음을 교육하는 조직이기도 하며 「일본어」교육만을 목적으로한 곳은 아니었다. 6,7,8의 언어교정은 2부터 5까지의 일본어・외국어발음의 교육이라는 활동목적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라쿠세키샤 활동의 특징은 규정1의 「시화법」에 드러나 있지만 여기서는 라쿠세키샤의 활동목적이 일본 내의 「일본어」통합에 한정되어 있지 않았다는 지적에서 그치려한다. 시화법에 대해서는 제 4절에서 구체적으로 다루려한다.

이와 같이 라쿠세키샤는 「시화법, 영어, 중국어등에 중점을 두고 그가 교수로서 새로운 계기를 삼으려고 심혈을 기울여 교육안까지 작성하였다.」[고 이자와선생 기념사업회(편)1919:249]. 그러나 예상밖의 결과가 찾아왔다.

그런데도 일은 의외의 부분에서 발생해 막상 학생을 모집하자 모였던 학생들은 12,13세의 소년보다 17,18세의 청년 ……50대의 노인도 섞여서 겨우 7명, 전부 말더듬교정을 희망하는 이들 뿐이었으며 다른과목에 대한 지원자는 전무했던 상황이었다. [고 이자와선생 기념 사업회(편)1919:249].

말더듬 교정소로서의 라쿠세키샤의 발전은 당초의 목적이었다기보다는 당시 치료법이 확립되어 있지 않았던 말더듬교정의 「상상이상의 효과」에 따른 것이었다.

일본의 말더듬교정이란 사업은 온전히 선생〔=이자와 슌지〕의 발명으로 따라서 말더듬교정이란 말도 새로운 것이었다. 그래서 그 처음에 세상사람들은 약을 복용하게 하는지 굿이라도 하는지 어쨌든 코이시가와에 말더듬을 고치는 의사가 출현했다고 하며 한번 가서 보고 말해보려 할 정도였다. 그런데 상상과는 다르게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성실한 선생의 교정법에 의지해서 가볍게는 3주간 정도로 보통사람처럼 말할 수 있게 되고 교정된 사람들 자신도 이건 신이 한 일인가 라며 신기하게 생각할 정도였다[고 이자와선생 기념사업회(편)1919:250].

라쿠세키샤의 말더듬교정은 「신이 한 일」이라고 여길 정도의 치료효과를 나타냈다. 라쿠세키샤가 말더듬교정의 조직적 착수의 시작이라고 여겨지는 근거는 말더듬에 대한 치료효과와 그에 동반되는 사업확대에 대한 것이다. 라쿠세키샤는 메이지 후기부터 다이쇼기에 걸쳐서 「오늘이야말로 라쿠세키샤라고 하면 천하에 감출 수 없는 말더듬교정소라고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자」[고 이자와 선생 기념사업회(편)1919:250] 이라고 할 정도로 말더듬교정소로 발전했다.

라쿠세키샤가 말더듬교정소의 기관으로서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1897년이후의이자와 슌지에 주목해 보면 다음의 2가지 의문이 든다. 첫번째로 대만에서 「일본어」교육을 추진해 온 이자와 슌지가 왜 말더듬교정과 더불어 영어・청나라어・대만어의 발음을 내세워 라쿠세키샤를 설립했는가. 두번째는 어떻게 말더듬교정 효과를 낼 수 있었는가이다. 이 두가지 의문을 통해 일본의 말더듬교정의 원류(源流)에 대해 확인하려 한다.

3. 「일본어」교육부터 말더듬교정으로

첫번쩨 의문은 대만에서 「일본어」교육을 추진해온 이자와 슌지가 왜 말더듬교정과 더불어 영어・청나라어・대만어의 발음전습을 내세워 라쿠세키샤를 설립했는가이다.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라쿠세키샤 설립에 이르기까지의 이자와 슌지의 경력을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 할 필요가 있다.

이자와 슌지는 1897년에 대만총독부 학무부장을 사임했다. 학무부장을 사임한 원인은 대만에서의 국어(일본어)학급의 축소에 관한 예산삭감이 발단이 되었다. 이자와 슌지는 증액을 요구하며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대만총독부 총독(당시)에게 상세 보고서 [이자와1897a]를 제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자와 슌지는 학무부장을 사임하게 되었다. 이자와 슌지가 자리를 걸고서까지 주장했던 것이 대만에 있는 일본어학교의 수업료를 무료로 해서 공학(公学)으로 삼으려는 것이었다[이자와1897b]. 일본의 초등교육의 수업료가 폐지된것은 1900년이며 오구마에이지에 따르면 일본보다 앞서 대만의 일본어학교를 공학화(公学化) 하는 것은 식민지지배의 재정난에 시달리던 일본정부에게 「그〔=이자와 슌지〕의 구상은 당시의 재정상태로 불때 너무 야심적이었던 」[오구마 1998:100]시도였다.

이자와 슌지가 공학화를 통해 달성하려고 했던 것은 대만에서 일본어회화를 뿌리내리는 것이었다고 한다 [오오하마(大浜) 2003]. 예를들면 이자와 슌지가 후일담으로 말했던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있다. 이자와 슌지는 1895년에 대만에서 12년간 학교운영 경험이 있는 버클리(T, Barclay) 라는 선교사를 방문했다. 그때 일본어 학교운영을 반대하는 버클리에게 「나는 확신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일본어로 가르진다. 」[이자와1908→1958:649]라고 답했다. 이자와 슌지에게 일본의 대만통치에는 「반드시 서로 말이 통해야 한다」[이자와1897c→1958:639]는 것이었다(9). 「말을 이해한다」는 것은 서로 음성으로 대화가 가능한 것을 의미했다. 이자와 슌지는 대만의 식민지 정책에 일본어로 음성을 나누는 대화가 가능해지는 것이 필수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고 한다.

첫번째로 대만에 가르쳐야 하는 것은 말하는 언어이다. 우리들이 지금 말하고 있는 이 언어이다. 결코 5,6백년 혹은 천년전의 국어가 아니다. 우리들이 지금 말하고 있는 이 국어가 가장 대만인에게는 필요하기 때문이며 그것을 가장 최우선으로 두고 가르쳐야 한다[이자와1897b→1958:616].

오사시즈에(長志珠絵)는 언어의 음성 측면을 중시하는 이자와 슌지를 「음성언어주의」라고 특징짓는다[오 1998:207](10). 이자와 슌지는 이미 1889년에 「언어라는 것은 어떤 사람의 입에서 나와 다른 사람의 귀에 들리고 그로인해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통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이자와1889→1958:664(방점 생략)]이라고 했다. 이자와 슌지에게 음성언어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대만총독부 학무부장을 사임한 경위에서도 추측가능하다.

인간에게 언어만큼 중요한 것은 없으며 실로 사람은 만물에 영장이라고 말하는 것도 언어를 가지고 말하는 것을 들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깊이 믿고 의심에 여지가 없는 부분입니다. 이토록 소중한 언어라 하는 것을 오늘날까지 우리국민이 완전히 내버려 두고 연구하지 않았던 것은 간단히 말하면 만물의 영장에 관한 가치를 마치 버리고 끝내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씀드려도 그다지 이상할 것이 없다고 생각됩니다[이자와1889→1958:690]

음성언어를 중시하는 이자와 슌지의 자세는 라쿠세키샤 설립에도 관철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이자와 슌지의 음성언어주의는 라쿠세키샤규정의 (1)에 적혀있던 「시화법을 배운다」의 「시화법」에 관련되어 있다. 이자와 슌지는 1875년부터 3년간 미국을 방문했으며 그때 그레이엄 벨이 장애아 교육에 사용했던 수법(Visible Speech)를 습득했다(11). 벨의 수법을 응용한 시화법이란 발음기호의 한 종류를 이용한 언어교정이다. 시화법의 특징은 발음기관의 위치나 형태를 표시한 기호를 사용하기 때문에 어떠한 문자에도 입각하지 않은 기호를 이용한다는 점이다(그림―1・그림一2・그림一3참조)(12). 이자와 슌지에게 특정문자에 입각하지 않은 시화법을 이용한 언어교정은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기호를 통한 언어교정이었다.

◎ ㈲그림―1시화법의 예1([이자와1904→1958:788]에서)
보통모음표 [좌]그림一2시화법의 예2([이자와1904→1958:793]에서)
[우]그림一3시화법의 예3([이자와1910→1958:857]에서)

애초에 Visible Speech는 세계에서 인류가 발하는 음 즉, 말을 나타내기 위해 발명된 부호 또는 문자중에 가장 도리에 맞고 가장 정확하게 발음을 드러내고 게다가 가장 이해하기 쉬우며 배우기 쉬운 방법으로 실로 만국보통음자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것이다[伊沢1go1:ii―iv].

시화법은 「만국보통음자」(혹은「만국보편음운문자」[이자와1889→1958:692])를 이용하여 「영어 그 밖의 외국어도 그 도움을 받아 배울 수 있는 방법」[이자와1go1:iv]이다. 라쿠세키샤란 시화법을 이용해 일본어・영어・청나라어・대만어의 발음을 가르치고 사투리・말더듬을 교정하는 기관이었던 것이다.

라쿠세키샤의 활동목적은 「만국보편」인 음성표기 기호를 사용한 시화법으로 「바른」 발화를 익히는 것에 있었다. 사투리나 말더듬교정을 목적으로한 라쿠세키샤를 시화법을 이용해 일본(내지)의 언어적 통합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라쿠세키샤 규정에 적혀있던 영어・청나라어・대만어의 발음을 가르친다는 기술의 배경에는 음성언어주의라는 식민지 교육부터 일관된 이자와 슌지의 자세가 있었다. 말더듬 교정기관으로서의 라쿠세키샤는 시화법과 음성언어주의의 연결을 통해 말하자면 부속적으로 탄생한 것이다.

라쿠세키샤의 말더듬교정이 부속적으로 생긴 것이라고 해서 말더듬 교정소로서의 라쿠세키샤를 경시해야 되는 것은 아니다. 다음 절에서 적겠지만 시화법을 사용한 말더듬교정은 「효과가 있었」다. 다음 절에서는 이자와 슌지의 언어교정과 시화법을 이용한 말더듬교정의 「효과」관련을 확인한다.

4. 시화법과 말더듬교정

두번째 의문은 어떻게 말더듬교정의 「효과」를 거둘 수 있었는가이다. 메이지・다이쇼기의 라쿠세키샤의 활동 약력은 표-1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信濃교육회(편) 1958].

라쿠세키샤가 말더듬교정소로서 사업을 확대했던 것은 표-1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현재는 라쿠세키샤의 말더듬교정 효과를 상세하게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말더듬교정의 방법이 자료로 남아있기 때문에 같은 방법으로 말더듬교정의 효과를 참고할 수 있다. 현대에서 말더듬치료에 대해 조사한 이토신지등에 따르면 교정소를 다닌 말더듬이에게는 1개월정도 후에 말더듬 증상이 「재발」한다는 보고가 있다[이토;・우에다1973][이토;1974]. 현재의 말더듬연구에서 이자와 슌지가 시화법을 이용해 교정한 것과 같은 말더듬증상의 치유는 「Destruction 효과」라 불리고 있다. Destruction 효과란 평상시와 다른 화법을 구사함으로서 일시적으로 말더듬증상이 사라지는 효과를 가리킨다. Destruction(긴장이완) 이란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 효과는 긴장해서 팽팽해졌던 근육을 이완시킴으로서 발화가 가능해지는 (일시적) 효과라고 알려져 있다. 대부분의 말더듬이에게 Destruction 효과를 통한 말더듬 증상의 개선은 일시적인 것이며 재발하는 경우가 많다(13). 현재의 말더듬 연구에서는 일시적으로 말더듬이 사라진다고 해도 Destruction 효과는 말더듬의 치료라고 보지 않는다.

현재의 말더듬 연구를 통해 추측한다면 라쿠세키샤의 말더듬 교정은 완전히 치유된 사람이 있다던가 일시적인 말더듬 증상의 소실에 그친 사람도 적지 않으리라 여겨진다. 그렇다면 시화법을 이용한 말더듬 치료의 효과라고 불렸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라쿠세키샤의 말더듬교정이 어떠한 것이었는 지를 알기위해서 이자와 슌지의 말더듬 정의를 확인하겠다.

우선 말더듬이라는 것은 어떠한 것이냐 하면 말더듬은 농이라든가 혹은 맹이라는 사람과는 전혀 다르다.……불구(不具)〔농과 맹〕은 교육의 힘으로 낫게 할 수는 없다. 단지 그에 해당하는 다른 기관을 가지고 어떠한 손실된 기관을 대신 써서、어떻게든 일을 처리할 수 있게는 할 수 있지만 완전한 사람처럼 될 수는 없다. 그래서 말더듬이라는 것은 그러한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오관이 잘 갖춰진 완전한 사람이지만 말을 할때 말이 잘 안나오는 겉으로 보기에 거의 불구자(不具者)인 것처럼 보인다[이자와1912→1985:290-291].

表―1(略)
표一1라쿠세키샤・말더듬교정에 관한 활동약력(『이자와 슌지선집』에서 발췌)

말더듬이란 「단지 발음상에 하나의 나쁜 버릇이 들어있는 것이기 떄문에… … 비참한 상태에 빠져있는 것이다.」[이자와1912→1985:292]. 「완전한 인간」의「버릇」이기 때문에 「상당히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든가 또는 정신 발달이 불완전한 사람 이외에 보통 교육을 받는 사람이라면 」[이자와1912→1985:300] 교정가능하다. 시화법을 이용한 발성은 모든 사람에게 맞는 발성방법이며 「말더듬은 낫는 것이 당연하며 낫지 않는 것은 오히려 이상하다」[이자와1912→1985:308]라고 되어있다.

이자와 슌지의 말더듬 정의에서 분명한 것은 말더듬은 신체(발성기관)에 발생한 후천적인 습관(「버릇」)이라는 점이다. 예를 들면 이자와 슌지는 독일의 말더듬 연구자 구츠만(H.Gutzmann)과의 다른 점을 강조하고 있다. 구츠만은 말더듬이란 뇌신경・언어중추의 이상이며 선천적인 것으로 보고있지만 이자와 슌지는 말더듬이란 「성대를 긴장시키는 습관이 큰 원인이다」[이자와1911→1956:869]라고 했다. 이자와 슌지에게 말더듬에 선천적인 요인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때문에 말더듬증상의 「재발」은 말더듬이 자신의 정신수행 부족으로 해석된다.

때로는 드물게 낫지 않는 사람이 없지는 않지만 그런 경우는 대개 열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던가 또는 무교육의 결과이다[이자와1912→1985:308].

라쿠세키샤에서 말더듬수정은 정신수련의 장이기도 했다. 「결코 발음의 연습만으로〔말더듬 교정이〕가능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정신수양을 해나가는 그 사이에 의지의 단련도 하고 인내력도 기르는 것이다.」[이자와 1912→1985:309](14).

이와 같이 이자와 슌지가 「과학적 말더듬 교정법」[이자와1912→1985]이라고 부른 말더듬 교정은 다음과 같은 과정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첫째 모든 사람에게 맞다고 여겨지는 「시화법」에 따라 언어교정이 이루어진다. 두번째로 시화법에 따라 말더듬 증상이 개선된다. 그러나 말더듬이 중에서는 Destruction 효과라는 일시적인 개선을 보이는 사람도 있다(15). 세번째로 시화법은 모든 사람에게 맞는 음성기호를 이용한 언어교정이기 때문에 시화법을 이용해 발성이 안되는 것은 본인의 책임이다. 말더듬 교정의 「효과」는 교정효과가 없는 사람은 말더듬이의 정신수련이 부족하다고 해석됨으로 인해 성립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라쿠세키샤의 말더듬교정은 말더듬이에게 어떠한 곳이었을까? 말더듬 교정의 감사를 고하는 다음의 편지는 당시의 말더듬 교정의 상황을 전해주고 있다.

라쿠세키샤에 들어간 전후에 수천명 중에는 저희아이처럼 완전히 나은 사람이 많습니다. 약간 나은 사람도 있고 별로 효과가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이들을 가르치시는 재사중옹(在社中翁)〔=이자와 슌지〕의 교수가 준엄해서 견디지 못하고 화내며 도중에 퇴사하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만약 과연 그렇지만 그것은 부당한 생각입니다. 예를들면 병에 걸린 사람이 입에 쓰더라도 약을 먹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가르침을 열심히 받다보면 스스로 준엄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준엄함에 견지디 못하는 것은 너무 의지가 약한 것입이다. 어르신의 애정을 깨닫습니다. 스스로의 병을 고치는데 열심히 하게 됩니다. 그러한 생각으로는 만약 말더듬이 낫는다 할 지라도 보통사람보다 나아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고 이자와 선생 기념 사업회(편)1919:275]

앞서 기술했듯이 시화법을 이용한 발화의 교정은 말더듬이의 정신수양을 갖추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말더듬 증상이 재발한 말더듬이는 한번더 교정을 받든지 연습부족이라는 개인적이유로 말을 더듬게 되었다고 여겨지게 되었다. 그 결과 「재발하면 자기자신의 노력이 부족했다고 생각해서 다시 교정소를 방문한다」[이토(편)1976:53]라는 구조를 갖추면서 말더듬 교정은 진행되었던 것이다. 라쿠세키샤의 말더듬교정의 귀결은 말더듬 치유뿐만 아니라 분명 나아야 하는데 낫지 않는 「〔말더듬이가〕낫게 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고민이 깊어지는 악순환」[이토(편)1976:55]의 형성이기도 했다. 말더듬교정 그 자체가 발화교정이면서 동시에 말더듬 교정이 말더듬이 자신의 문제라는 것을 전달하고 있었다. 즉 라쿠세키샤의 말더듬 교정은 정상적인 발화를 둘러싼 〈앎〉의 실천의 장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시화법과 〈정상적인 발화〉에 대해 확인하도록 하자. 이자와 슌지의 말더듬 교정에서 정상적인 발화는 시화법이라는 방법과 관련되어 있다. 말더듬교정은 정상적인 발화를 기호화하는 장치(=시화법)을 가지고 행해지고 언어교정을 정신수련의 장으로 파악함으로 가능했다. 이자와 슌지의 언어수정은 단지 개인적인 문제인 발화를 교정하는 것만으로 성립되있는 것이 아니다. 정상적인 발화를 측정하는 등의 방법이나 교정을 말더듬이의 정신과 결부시킴으로서 말더듬 교정은 실천되어 왔던 것이다. 시화법이라는 측정방법과 말더듬교정은 말더듬이 병이라는 것과 더불에 말더듬의 재발이 말더듬이의 「개인적인 책임」이라는 〈앎〉과 연결되어 비로소 말더듬 교정으로서 실천가능했다. 그 결과 말더듬교정은 말더듬 치유이기도 하면서 치유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악순환」이기도 했던 것은 말더듬이에게 아이러니한 결과이기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5. 맺음말

본 원고는 말더듬교정에 관한 〈앎〉의 생성과정을 밝히는 시도를 했다. 메이지기에 대만총독부에서 「일본어」교육을 진행시킨 이자와 슌지는 후년에는 음성언어주의라 불리우는 사상을 계승하여 라쿠세키샤에서 시화법이란 방법을 이용해 언어수정을 실시했다. 라쿠세키샤에서 행해진 말더듬이에 대한 언어교정이란 음성언어주의와 시화법이 합쳐진 결과 탄생한 「효과」였다. 말더듬 교정은 반드시 말더듬 증상의 장기적인 개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말더듬이의 정신수련과 연결시킴을 통해 비로소 가능했던 언어교정이었다.

이상의 고찰은 말더듬 교정 중에서도 라쿠세키샤라는 하나의 기관을 다룬 것에 지나지 않는다. 본 연구는 라쿠세키샤이외의 말더듬 교정의 대처나 실제 말더듬 교정을 체험한 말더듬이에게 말더듬 교정의 의미 나아가서는 말더듬 교정을 체험한 적 없는 상태로 사는 말더듬이에게 말더듬 교정의 의미로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다(16). 그러나 본 원고의 시도로부터 다음 두가지의 지견을 얻을 수 있었다.

첫번째 라쿠세키샤의 말더듬 교정에 관한 〈앎〉은 시화법이라는 방법과 함께 형성된 〈앎〉이라는 것이다. 이자와 슌지는 대만에서의 「일본어」교육의 연장으로서 언어교정을 한 것이 아니었다. 라쿠세키샤의 활동에는 「과학적」이며 모든 사람에게 맞다고 여겨지는 시화법이란 방법이 있었다. 말더듬 증상을 「병」으로 본다는 〈앎〉이 말더듬 증상을 측정하는 방법과 정신수련의 사상이 연결된 〈앎〉이라는 것을 밝힐 수 있었다.

두번째로 시화법을 이용한 말더듬 교정은 언어교정이면서 동시에 언어교정을 개인적인 정신의 문제와 연결시킴으로써 말더듬 증상이 말더듬이 자신의 문제라는 것을 전달하는 실천이었다. 즉 말더듬 교정의 장 그 자체가 정상적인 발화를 둘러싼 앎의 실천의 장인 것이다. 말더듬이라는 한정된 언어장애에 관해서 이지만 교정(치료)의 장면이 앎의 형성에 미친 측면을 놓쳐서는 안된다.

또한 정상적인 발화를 둘러싼 앎의 실천은 교정(치료)의 장면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서론」에서 들었다시피 정상적인 발화를 개인적문제로 보고 「치료」를 종용하는 것 그것이 이토가 「악순환」이라고 일컬은 말더듬이의 고난에 가담하는 과학적인 운영과 동떨어져있지 않다고 생각된다. 말더듬 교정의 역사사회학의 시도는 메이지・다이쇼기에 그치지 않고 현대사회에서도 자명시 되어있는 정상적인 발화에 관한 〈앎〉을 강조하는데에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 언어교정에 관한 〈앎〉과 일상적인 상호행위장면에서 보여지는 〈앎〉의 생성과 수용이 어떻게 연관되어 형성되었는가? 이것이야 말로 정상적인 발화를 둘러싼 〈앎〉을 과제로 하는 필자에게 부여된 다음 문제가 될 것이다.

(1) 말더듬 증상을 분류한 말더듬 검사표에 따르면 「삽입」(문맥에서 벗어난 의미상 불필요한 어음・말・구의 삽입)이라 불리는 증상이다[赤星등1981].

(2) [사토佐藤2001:24]를 참조.

(3) 물론 1903년 이전에도 말더듬 치료는 실시되어 왔다. 예를 들면 1892년6월21일의 『요미우리신문』에는 적십자병원의 말더듬치료를 방문하는 황후에 관한 기사가 있다. 본 고는 전문적인 말더듬 교정기관의 시초로서 라쿠세키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4) 「이자와 슌지씨가 말더듬교정법에 해당하는 것을 만든 이후 세상이 점차 여기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요미우리신문』1905년3월12일]등의 신문기사를 통해 희망자가 증가했다고 한다. [고 이자와선생 기념사업회(편)1919:251-33]

(5) 자세한 것은 [上沼1962]를 참조.

(6) [サ1982][イ1996][駒込1996][陳2001]등을 참조. 그러나 전부 라쿠세키샤의 말더듬 교정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고 있지 않음. 이토신지는 말더듬 교정은 「자신〔=이자와 슌지〕이 〔남동생의 말더듬〕을 고친 것처럼 다른 말더듬이도 나았으면 하는 애정」[이토1974:133]에 따른 것으로 보고 대만에서의 「일본어」교육과의 관련은 다루지 않고 있다.

(7) 사직후의 중국어연구에 관해서는 [埋橋1999]가 있다.

(8) 이하 옛자체를 새자체로 가타카나를 가나로 했다. 또 현재는 차별용어로 볼 수 있는 용어도 포함되어 있지만 원문대로 표기했다.

(9) 이자와 슌지는 「혼화(混和)주의」라 불리는 독자적인 대만 통치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오구마小熊1997;1999]를 참조.

(10) [오구마小熊1999]도 참조.

(11) 전화 발명가인 그레이엄 벨의 장애아 교육에 관해서는 전기를 참조 [Bruce1973=1991]. 「시화법」이란 낮선 말은 그레이엄 벨(Alexander Graham Bell)의 아버지 멜빌 벨(Alexander Melville Bell)가 개발한 Visible Speech를 이자와 슌지가 번역한 것이다. 같은 시기에 일본에서는 [遠藤;1906]등이 있다.

(12) 예를들면 영어발음기호는 로마자를 모체로 하고 있다.

(13) 말더듬 증상의 재발은 성인 말더듬이에게 두드러진다고 알려져 있다. 말더듬 치료는 그 종료시기를 어디에 둘지가 문제시된다. [Sheehan1980][小澤1997]등을 참조.

(14) 이토는 라쿠세키샤의 말더듬 교정의 특징을 (1)호흡훈련 (2)발성훈련 (3)정신강화훈련으로 한다[伊藤1974:132]. 또한 메이지 후기의 「수양(修養)주의」에 관해서는 [筒井1995]를 참조.

(15) 현재도 말더듬의 근본적인 치료법은 나오지 않은 것을 봤을 때 치유하지 않는 말더듬이의 수는 적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16) 또 정상적인 발화에 대한 역사적 시점은 공적인 자리에서 근대일본어의 구성을 고찰하는 [佐藤1996]등의 역사사회학과도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references

see references in Japanese

figures and tables

see original paper (PDF file, Japanese)

acknowledgment

This work was supported by Subsidy for International Dissemination of Research Results (Program to Support the Creation of Websites in Foreign Languages) (FY2016), Ritsumeikan University.

初出:渡辺克典,2004,「吃音矯正の歴史社会学――明治・大正期における伊沢修二の言語矯正をめぐって」『年報社会学論集』関東社会学会,第17号,25-35頁.